정두언 유서

정두언 사망 소식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정두언의 죽음은 노회찬 사망 때와 비슷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두언 죽음을 놓고 네티즌들은 바른말을 하던 정두언이 결국 자.살당한 것이 아니냐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찰은 정두언 사망을 자.살로 단정 지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정두언 자택에 유서가 발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경찰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58분 정두인 자택에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는 부인의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유서에 대해 아직까지 경찰은 확인중이라고 답변할 뿐 정두언 유서 내용이 어떠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두언이 집에 유서를 써놓고 갔다고 해서 이게 무조건 자.살일까? 누군가가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조작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할 때 자필 유서가 아니었다. 당시 유서가 컴퓨터 화면에 띄워져 있었다고 해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물론 정두언 유서가 자필 유서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만약 자필 유서가 아니라면 타살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정두언 우울증만 언급하지 말고 말이다. 

 

한편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드론과 구조견 등을 투입해 이날 오후 4시 25분께 정두언 전 의원이 서대문구 홍은동의 한 공원에서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쯤에서 정두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정두언 전 의원은 1957년생으로 올해 63세다.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군수를 지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의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이 먼 당숙뻘이었기 때문이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어서,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낸 정두언은 가슴이 한이 많았다. 어머니는 모래내시장에 좌판을 펴서 5남매를 교육시켰지만,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하는 일이 벌어져 마음 한구석에 복수심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복수심이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너무 두렵고 싫어서 이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했다고 한다.

 

정두언은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행정사무관 시보 임용 후 정무 제2장관실에 배속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무 제2장관을 보좌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20여 년간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직을 담당했다.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국무총리실에 사표를 제출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2004년 자유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공천을 통해 제17대,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면서 3선 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방송인으로 변신해 활동했으며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를 한국의 현 방송인 겸 자영업자로 소개하곤 했다. 또한 전 공무원 겸 정치인, 아마추어 가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중학교 때부터 팝송을 많이 불렀고,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Spirit of 1999'라는 록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두언은 살아생전 꽤 다사다난한 인생을 보냈으며 때론 정치계의 풍운아로 종종 불리기도 했다. 20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를 사실상 떠났고, 그 뒤로는 여러 시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시사 평론가의 길을 걸었다. 

물론 정두언도 한때는 대표적인 친이계 인사였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이상득 전 의원의 2선 후퇴를 강력하게 요구하다가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 측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서 친박계도, 친이계도 아닌 당내 비주류 인사로 분류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우린 정두언과 이명박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 먼저 정두언과 이명박에 대한 인연과 디스 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정두언과 이명박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이명박이 국회의원 시절 그를 찾아와 서울 특별시장 선거캠프 합류를 권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자신을 판단을 믿고 합류한 정두언은 이명박의 서울시장 출마를 거의 혼자서 준비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이명박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이명박 시장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한 그는 2004년 제17대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게 된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두언은 친이계 핵심인물로 이명박 캠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당내 경선 과정에서 상대한 박근혜 후보의 검증에 한 말이 지금도 유명한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낱낱이 밝히면 박근혜 좋아하시는 분들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다." 이 말은 9년 후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다시 재조명받기도 했다. 

 

 

2007년 12월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당선자 보좌역이 되었고 MB 정권의 핵심 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초기에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정권을 위해 2008년 총선에 불출마하라고 요구했다가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도 정두언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됐다. 그리고 2010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 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두언과 이명박은 인연은 서서히 악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2012년 솔로몬 저축은행 비리 건으로 이상득과 함께 기소되어 무려 10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무죄가 확정되면서 6,500만 원가량의 형사보상금을 받고 풀려났다. 이 돈은 모두 전액 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때부터 정두언은 이명박과 박근혜에 대한 날 카로운 저격을 하기 시작했다. 2015년 10월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지적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모순이고, 전략적으로도 큰 실책이다."라고 날세 비판을 했다. 또한 박근혜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나라가 군정 종식은 됐어도 왕정 종식은 못 했다"라는 발언을 하여 주목받기도 했었다.

 

특히 이명박도 국정원 특수활동비 사건에 대해서 저격수 역할을 톡톡히 했던 정두언은 2018년 1월 18일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MB는 종 쳤다"는 멘트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이명박이 몸이 안 좋다고 하자 "보석을 받아들이는 게 어떠냐. 다만 사기일 가능성도 있으니 종합 건강검진을 하는 게 좋다"라고 디스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두언이 무조건 이명박, 박근혜만 비판한 것은 아니다. 2018년 12월, 서울 마포구에 일식집을 개업하고 나서는 자영업자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문재인 정부의 임금 상승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었다. 근데 장사는 오픈 빨 인지 잘된다고 밝혀 웃음을 주기도 했었다.

 

끝으로 정두언은 그래도 보수 중에서는 바른말을 할 줄 아는 진짜 보수 논객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 서울대까지 나와 정치계에서 나름 크게 성공했고 정계를 떠난 후 방송에서는 시사 논객으로 출연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멋진 인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싸늘한 주검으로 공원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경찰은 성급히 자.살로 단정 짖지 말고 정두언 사망 이유를 명백하고 철저하게 밝혀냈으면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바란다. 공감시 아래 하트를 꾹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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